2013/05/06

20년간의 비핵화회담이 결렬된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변혁과 진보 (11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지금 한반도는 전략적 전환기에 들어섰다. 국면을 뒤바꿀 전술적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전략적 전환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략적 전환이란 지난 20년 동안 지속된 비핵화회담이 완전히 결렬된 것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 근본적 변화다.
 
100년 만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전략적 전환기에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정세흐름을 예민한 감각으로 주시하면서,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한 근로대중의 조직역량을 더 공고하게 축적하고 지지기반을 더 넓게 확장해야 할 것이다. 전략적 전환기에 자기의 역사적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 붓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의 모습, 그런 미더운 모습을 기다려 이 땅의 수난 많은 100년 역사가 이제껏 흘러왔는지 모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은 열정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투쟁과정을 동반하게 된다. 그 투쟁과정에서 승리하고 전진하려면, 예리한 통찰력으로 오판 가능성을 밀어내고 과학적인 심층분석으로 착오를 뛰어넘어야 한다. 진보정치의 정적들은 정보분석과 정보판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데, 그들과 맞서 싸우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주먹구구식으로 판단한다면,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은 제자리에서 맴돌게 될 것이다. 특히 전쟁재발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오늘, 한반도 평화문제에 관한 분석과 판단에서 치밀하고 정확한 인식이 요구되는데, 이 문제를 해설하면 아래와 같다.

부쉬의 술책으로 잠깐 등장했다가 완전히 폐기된 종전선언 문제
지금 일부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미국에게 종전선언을 촉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견해의 배경에 10.4 선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채택된 10.4 선언에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에서 주목하는 것은,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노무현 대통령이 요구하여 10.4 선언에 들어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왜 종전선언 문제를 10.4 선언에 집어넣은 것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왜 노무현 대통령의 종전선언 문제를 받아들인 것일까? 그 사연은 아래와 같다.
 
2006년 11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가 진행되는 중에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부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종전선언 문제를 처음 언급하였다. 그 회담에서 부쉬가 느닷없이 종전선언 문제를 꺼낸 배경과 의도에 관해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북은 2006년 7월 4일 강력한 초음속 지대함 순항미사일을 불시에 동해로 발사하여 미국에게 충격을 주었고, 10월 9일에는 제1차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여 미국에게 연속타격을 가했다. 북의 연속타격을 받고 궁지에 몰린 부쉬는 자기가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으로 종전선언 문제를 불쑥 꺼내놓은 것이다. 이것이 부쉬가 그 문제를 꺼내놓은 배경이다.
 
둘째, 부쉬는 종전선언 문제를 언급할 때 북의 핵포기를 전제조건으로 달아놓았다. 북이 핵을 포기해야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쉬는 북을 핵포기로 유인하려는 얕은 술책으로 종전선언 문제를 꺼내놓은 것이다. 이것이 부쉬가 그 문제를 꺼내놓은 의도다.
 
셋째, 위와 같은 미국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진행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 중에 부쉬와 만나 정상회담을 하면서 부쉬에게 종전선언에 관해 분명히 언급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부쉬는 그 요청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서둘러 회담을 끝내버렸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종전선언이라는 신조어 뒤에 부쉬의 간계가 감춰져 있었다는 점이다. 부쉬의 간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원래 종전선언이라는 말은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한다는 뜻이지만, 한반도에서는 불과 불이 오가는 교전상태가 지속되어오는 게 아니라 일촉즉발의 전쟁위험이 고조된 정전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므로, 한반도의 현 정세에서 쓰이는 종전선언이라는 말은 정전상태가 끝났음을 선언한다는 뜻이다.
 
정전상태가 끝났다고 선언하려면, 당연히 전쟁위험의 완전한 해소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전쟁위험은 그대로 남겨두고 정전상태가 끝났다는 허울 좋은 종전선언만 하려는 것이 부쉬의 간계였다. 다시 말해서, 부쉬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지 않고서도 종전선언 정도는 발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거부하려는 술책으로 부쉬가 조작해낸 간계가 종전선언이라는 신종개념이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은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것을 거의 광적으로 거부하고 필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전쟁재발위험을 끊임없이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그처럼 광적으로 거부하고 전쟁재발위험을 계속 유지하는 까닭은,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미국의 아시아 지배력이 결정적으로 위축되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미국은 이 땅에서 자기 군대를 철군해야 하고, 미국군대가 한반도를 떠나면 ‘한미동맹’에 깨지게 되고, ‘한미동맹’이 깨지면 미국의 대남지배체제가 무너지게 되고, 미국의 대남지배체제가 무너지면 한반도 평화통일이 실현되어 강력한 통일국가가 출현하게 되고, 미국은 동아시아대륙에서 일본열도로 밀려나게 되고, 그렇게 밀려난 일본열도는 한반도 통일국가의 위세에 눌리게 된다. 그래서 미국은 평화라는 추상적 개념은 가끔 꺼내들면서도 평화실현의 유일한 실천강령인 평화협정이라는 말 자체를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부쉬의 간계를 간파하고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왜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종전선언 문제를 받아들였을까? 10.4 선언의 구절을 빌려 서술하면,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 “3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는 기회를 마련하기만 하면 평화협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체결하려는 것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상과 의지였기 때문이다.
 
10.4 선언에 나오는 3자 정상회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요구하였고, 4자 정상회담은 노무현 대통령이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을 배제한 3자 구도를 택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을 포함시킨 4자 구도를 택하였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한 4자 구도는 미국의 요구와 상통한 것이었다. 미국의 목적은 종전선언이 아니라 북의 핵포기였고, 북을 핵포기로 유인하려는 의도에서 종전선언 채택을 형식적인 유인책으로 여겼으므로, 미국은 당연히 중국을 포함한 4자 구도를 택하였다. 중국은 미국이 요구하는 북의 핵포기를 찬성하기 때문에, 만일 미국의 요구대로 4자 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미국은 북의 핵포기 문제와 관련하여 3 대 1의 구도로 몰아갈 수 있었다. 이런 미국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10.4 선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4자 정상회담을 고집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그래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난다”는 모호한 표현이 10.4 선언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북이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키는 전략노선을 채택함으로써 부쉬가 제안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화답하였던 종전선언 문제는 9.19 공동성명과 함께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런데도 이 땅의 일부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부쉬의 술책으로 잠깐 등장했다가 완전히 폐기된 종전선언 문제를 다시 꺼내놓는 것은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와 오판 으로 보인다.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추구하면서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간과하고 미국에 대한 경각심이 무디어지면 미국의 술책과 간계에 휘말릴 수 있고, 반제전선의 한 구석이 소리 없이 무너질 위험이 생기게 된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말이 되지 않는 종전선언 문제를 다시 꺼내놓을 게 아니라 미국에게 평화협정을 요구해야 한다. 종전선언은 미국의 간계이고, 평화협정은 이 민족의 정당하고 절박한 요구다.

 
평화회담 개최가 아니라 즉각적인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해야 한다
지금 일부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미국에게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를 촉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면 평화회담을 해야 한다는 말은 지당한 논리처럼 들리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현실 속에서 그 문제를 단순하게 파악하면 낭패다. 세 가지 요점을 논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반도 평화회담을 시작하려면, 평화회담 구도를 3자로 할 것인지 4자로 할 것인지 하는 심각한 문제를 놓고 북과 미국이 충돌할 것이다. 미국은 4자 구도를 요구할 것이고, 북은 3자 구도를 요구할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쌍방이 어떤 타협점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바로 이러한 요인이 숨어 있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회담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 평화회담을 시작하려면, 회담 구도만이 아니라 회담 개최지도 합의해야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0.4 선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반도 지역에서 평화회담을 열자고 합의하였지만, 미국은 10.4 선언의 그 합의를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중국을 한반도 평화회담에 참가시키려는 속셈을 품은 미국은 당연히 베이징에서 4자 평화회담을 열자고 고집할 것이다. 미국의 그런 속셈을 간파한 북이 미국의 요구대로 베이징 4자 평화회담 방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바로 이러한 요인이 숨어 있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회담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셋째, 평화회담이란 전시상황에서 제기되는 정치적 요구다. 예컨대,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 평화회담에서 밀고 당기는 치열한 협상을 진행한 끝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였고, 베트남을 침략한 미국군은 평화회담 합의에 따라 완전히 철군하였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는 일반적인 전시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다. 불과 불이 오가는 전시상황에서는 평화회담을 개최하여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지만, 한반도의 현 정세는 그런 전시상황이 아니다. 한반도의 현 정세는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전쟁재발위험에 매달리고 있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다.
 
미국은 자기에게 패색이 짙어진 교전상태에서는 평화회담을 하지 않고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정전상태에서는 무한정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러므로 교전상태에서 진행하는 평화회담은 몇 년 안에 끝날 수 있지만, 정전상태에서 진행하는 평화회담은 무한정으로 시간을 끌 수 있다.
 
북과 미국이 진행해온 비핵화회담이 2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채 완전히 결렬되었다. 북은 비핵화회담을 진전시키기 위해 미국에게 때로 요구도 하고 때로 압박도 하고 때로 위협도 하였지만, 미국은 그 모든 국면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20년 동안 비핵화회담을 공전시켰다. 미국의 집요하고 교활한 술책으로 결국 비핵화회담 자체가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그처럼 20년 동안 시간을 질질 끌면서 비핵화회담을 결렬시킨 미국에게 또 다시 평화회담을 시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다시 20년 동안 시간을 질질 끌다가 2033년에 가서 결국 평화회담을 결렬시킬 기회를 미국에게 안겨주자는 소리인가?
 
그러므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미국에게 평화회담을 요구할 게 아니라 즉각적인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해야 한다. 즉각적인 평화협정 체결은 미국에게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미국은 그런 요구를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겠지만, 비핵화회담을 20년 끌어오다가 결국 결렬시킨 미국에게는 그런 최후의 요구밖에 제기할 것이 없다. 미국의 굴복을 전제로 하는 즉각적인 평화협정 체결, 바로 이것이 비핵화회담 결렬 이후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미국에게 제기해야 할 마지막 정치적 요구다. (2013년 5월 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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